[풍경 뒤의 역사] 영도대교 - 바다와 사람을 잇고, 이별과 만남을 기억하는 다리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바다, 항구, 그리고 영도대교를 떠올립니다. 바다 위에 우뚝 선 이 대교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부산이 걸어온 역사를 상징하는 거대한 기억 저장고예요. 한 번 보게 되면 “왜 저 다리는 저렇게 생겼지?” 한 번 건너보면 “어쩐지 슬프고도 힘이 있다…”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다리입니다. 

영도대교(위키백과)
영도대교(위키백과)



한국 최초의 ‘도개교’ - 하늘로 열리는 다리의 비밀 

영도대교는 1934년 개통했습니다.무려 대한민국 최초의 도개교예요. 

도개교란?배가 지나갈 때 다리가 위로 들려 올라가는 구조예요.

영도대교 한가운데가 60도 각도로 들어올라 대형 선박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도개-장면
도개 장면


왜 이런 구조였을까요? 

일제강점기, 부산항은 일본 제국의 중추 항구 

무역·군사 이동이 많아 큰 선박 통행 필요 

영도와 부산 원도심을 연결해야 했음 

즉, 이 다리는 식민지 경제 전략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다리 위에서 부산 사람들의 삶 또한 시작되었어요. 



피난민의 만남과 이별의 다리 - “혹시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1950년 한국전쟁.부산은 마지막까지 남은 임시수도였고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이 넘쳐 났습니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영도대교에 나와 서 있었어요. 

 “부산에 살아 있다면 이 다리를 건너오겠지…” 누군가는 평생을 기다렸고 누군가는 다시 만나 울었습니다.그리고 누군가는 끝내 재회하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갔죠. 그래서 영도대교는 눈물의 다리라는 별명을 갖게 됩니다. 



부산 개항의 현장 -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 길 

부산이 개항한 뒤 영도대교는 한국이 세계와 연결되는 첫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외국인 상인과 선원들이 오가고 

항구 노동자들이 넘나들고 

부산의 경제가 이 다리를 통해 움직였어요.

다리 근처 국제시장, 남포동의 활기 역시 모두 이 항구의 교류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영도대교는 부산의 심장혈관이었어요. 

영도대교-야경
영도대교 야경



다시 열리는 다리 - 기억을 부활시키다 

시간이 흐르며 도개교는 중단되었습니다.1974년 마지막 도개 이후,40년 동안 다리는 닫힌 채로 남아 있었어요. 하지만 지나간 역사와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2013년 도개 행사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매일 14시(오후 2시), 다리가 올라가며 그 장면을 보기 위한 관광객이 모여듭니다. 부산 시민에게는기억을 다시 올리는 의식 같은 시간이죠. 

도개-모습을-보러-온-관광객들
도개 모습을 보러 온 관광객들



위로와 시작의 다리 - 영도대교가 말하는 것 

숱한 이별과 만남,기대와 절망이 모였던 다리. 그래서 이 다리는 항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보라.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역사를 견디고 도시를 지탱하고 사람들의 삶을 연결해온 다리. 영도대교는 부산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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