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라는 건 평범한 대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평소에 보던 일상적인 공간도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새로운 공간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림 속에 들어온 공간은 조금 특별한 시간성을 갖게 됩니다. 딱 한 순간의 모습을 잡아서 그린 거라 일회성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더 이상 변하지 않고 계속 가니까 영원성도 가지게 되는 거죠. 게다가 2차원 평면으로 옮겨지면서 그 안에 새로운 질서도 생깁니다.
1. 르네상스 화가들의 숙제와 원근법의 발견
르네상스 이후로 화가들에게 가장 큰 숙제는 평면에 3차원적인 깊이감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5세기에 발견된 '원근법'이 화가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주었는데요. 이 원근법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아시나요? 1415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앞에서 '브루넬레스키'라는 사람이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한 손에는 나무 패널을 들고, 다른 손에는 거울을 들어서 성당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조율하는 실험이었죠. 거울을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그림과 실제 성당 모습이 딱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찾은 겁니다. 이 실험을 통해서 원근법이 발견되었고,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놀라운 미술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수학이랑 과학 이론, 그리고 실험이 함께 만들어낸 발명품인 셈이죠.
2.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이 보여주는 완벽한 공간감
바티칸 궁전에 있는 라파엘로의 명화 <아테네 학당>을 보면 이 원근법이 아주 잘 쓰였습니다. 벽의 아치나 그림 속의 아치가 계속 이어지면서 실제 공간이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연결되는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평면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게 돼요. 마치 무대 위에 직접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정확하고 웅장한 공간감을 보여줍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한가운데 서 있는 두 사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물들 사이에 거리를 두고 표현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데, 전경, 중경, 원경을 나누어 표현하면 됩니다.
3. 형태의 겹침과 크기 변화로 만드는 그림의 깊이
가장 쉬운 방법은 사물들을 겹치게 그려서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뒤쪽에 있는 사물을 작게 그리는 건데요. 명암이나 그림자 없이 형태의 크기만 다르게 해도 깊이감이 느껴집니다. 대신 크기를 규칙적이고 일관되게 변화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이 방법들을 다 썼습니다. 계단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나 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겹쳐 있고, 크기도 뒤로 갈수록 점점 작아집니다. 그래서 가운데 있는 두 주인공에게 시선이 딱 머물게 되죠.
4. 17세기 화가들의 비밀 도구,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
당시 화가들은 이런 공간 탐구를 위해 다양한 도구도 썼는데, 대표적인 게 '카메라 옵스큐라'입니다.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인데, 일종의 암실을 의미합니다. 17세기 화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 아주 많이 썼던 도구예요.
원리는 지금의 카메라의 원리와 비슷합니다. 어두운 방 벽에 작은 구멍을 뚫으면 햇빛이 비치면서 마주 보는 벽에 바깥 사물의 이미지가 거꾸로 맺히는 원리죠. 화가들은 이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 그려서 수월하게 사물의 형태와 공간을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크기도 작아졌어요. 이 기술이 계속 발전해서 나중에 사진기의 효시가 된 것입니다.
5. 베르메르 <연애편지> 속 수직과 수평 구도의 안정감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써서 그림을 그린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계를 써서 베껴 그렸다고 하니까 화가나 그림에 대한 신비감이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실제와 같은 공간을 만드는 건 베르메르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연애편지>라는 작품의 제목을 보면 아주 정교하고 안정적인 느낌이 드는데, 수직과 수평 구도 때문입니다. 양옆으로 열린 문은 화면을 수직으로 3등분하고, 바닥의 체크무늬와 액자 선들이 수평선을 이룹니다. 수직선 안에서 사각형 모양을 만들며 입체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죠.
6. 사선 구도가 만들어내는 극적인 긴장감
하지만 그림을 조금 더 살펴보면 공간이 사선으로 움직이며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게 보입니다. 바닥 패턴이 만드는 사선이 여인의 팔과 어깨로 이어지고, 뒤에서 편지를 건네주는 하녀의 눈길로 연결되죠.
이런 구도가 그림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줍니다. 화면에 살짝 걸치듯 드리운 휘장과 빗자루가 걸쳐져 있는 열린 문 사이로, 관객이 몰래 숨어서 두 여인의 순간을 훔쳐보는 것 같은 긴장감이 생깁니다.
7. 오감으로 느끼는 캔버스 위의 다양한 질감
또 이 작품은 공간의 질감과 촉각적인 특성도 아주 두드러집니다. 방안에 스며든 햇살, 여인들의 숨죽인 목소리, 오래된 건물 냄새까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여인의 드레스와 모피는 화려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하녀의 옷은 투박해서 대비가 됩니다. 대리석의 매끈한 질감이나 바구니, 빗자루의 거친 질감까지 화면 전체가 다양한 질감의 느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8. 미술과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시각적 경험의 혁신
수백 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적인 느낌까지 눈앞에서 생생하게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사진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만들어 내는 그림이 마치 마술 같이 느껴졌을 겁니다.
요즘 우리가 화소가 높은 사진이나 HD TV의 기술에 감탄하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도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의 기술에 환호했던 것이죠. 이러한 미술과 기술의 발달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이를 재현하는 회화의 방식을 함께 혁신시켜 왔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눈앞의 두 여인이 편지를 주고받는 순간을 한번 감각적으로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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