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역사] 리스트, 피아노에 바친 시 — 슈만의 〈헌정〉을 듣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피아노를 오래 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곡, 원래 피아노 곡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이 드는 곡들이 있습니다. 리스트가 편곡한 슈만의 〈헌정〉이 딱 그런 경우입니다. 원곡은 성악과 피아노가 함께하는 가곡인데, 리스트의 손을 거치고 나면 피아노 한 대가 모든 걸 다 표현해버립니다. 처음 이 편곡 버전을 들었을 때 원곡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예요. 




가곡이란 무엇인가 — 시와 음악이 만나는 지점 

가곡은 독일의 예술 장르로,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슈베르트가 크게 발전시킨 형식입니다. 독일어로는 '둘체스 리트'라고 하는데, 부드럽고 서정적인 노래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시에 음율을 붙인 것인데, 작곡가가 시인의 글을 가져다가 그 감정과 분위기에 맞는 멜로디를 씌워주는 방식입니다. 

시와 음악은 가곡에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슈만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하이네, 아이헨도르프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작곡가들이 그 시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시로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당시 독일 가곡이 예술적으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건 좋은 시인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슈만이 1840년 한 해에만 138곡을 쓴 이유 

슈만은 원래 부모님 권유로 법률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음악의 길을 택했고, 1840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38곡의 가곡을 작곡했습니다. 그 시기에 슈만이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사 대부분이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바로 클라라 슈만입니다. 클라라의 부모님이 두 사람의 결혼을 몇 년 동안 극구 반대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게 됩니다. 이 챕터에서 소개할 〈헌정〉은 슈만이 결혼식 전날 밤 클라라에게 바친 곡입니다. 가사를 읽으면 슈만이 클라라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가 바로 느껴집니다. 


당신은 나의 영혼, 나의 심장 

당신은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당신은 나의 세계, 그 안에 사는 나오 

당신은 나의 무덤, 그 안에 나는 영원히 나의 근심을 묻었네. 


가사를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줄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무덤"이라는 표현이 어둡게 들릴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 안에서 모든 걱정을 내려놓겠다는 의미로 읽히더라고요. 낭만주의 시의 매력이 이런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리스트와 슈만 — 악보를 주고받은 두 천재의 우정 

프란츠 리스트와 슈만은 나이가 비슷했습니다. 두 사람은 30살 즈음 독일에서 처음 만난 후 꾸준히 연락하며 우정을 쌓아갔고, 서로 작곡한 곡의 악보를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리스트의 연주를 직접 본 슈만은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리스트는 슈만의 가곡 〈헌정〉뿐 아니라 슈만이 작곡한 예술 가곡 여러 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곡가의 곡을 피아노 연주회에서 직접 연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리스트가 작곡한 곡의 절반가량은 기존 작곡가들의 곡을 편곡한 것이라고 합니다. 

리스트의 편곡 방식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실험적이거나 음악적으로 난해한 방향을 추구했다기보다, 피아노라는 악기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맞게 재단한 것입니다. 과시적이고, 화려하고, 낭만적인 것이 리스트 음악의 색깔이니까요. 




슈만의 원곡 vs 리스트의 편곡 — 무엇이 달라졌나 

원곡자인 슈만은 가사에서 중요하다고 여긴 단어에 조금 더 강조된 음을 배치했습니다. 시에 맞춰 곡을 쓴 만큼 가사와 음이 분리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세밀하게 작곡하다 보니 예술 가곡으로 완성도 있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리스트가 피아노 솔로곡으로 편곡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원래 성악가나 소프라노가 노래하던 멜로디 라인을 피아노로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거기에 열 손가락을 모두 활용해 짧은 반주 시간을 늘리고, 앞부분과 뒷부분을 더 화려하고 길게 바꿨습니다. 누가 들어도 "아, 리스트 곡이다" 싶은 느낌이 납니다. 

로베르트-슈만(1810-1856)
로베르트 슈만(1810-1856)




곡의 마지막에 〈아베마리아〉가 흐르는 이유 

리스트 편곡 버전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음악이 끝나는 지점에서 피아노 반주가 몇 마디 더 이어지는데, 거기서 〈아베마리아〉의 멜로디가 등장합니다. 슈만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아베마리아〉 악보의 일부를 가져온 것입니다.

왜 넣었을까 생각해보면, 슈만이 시와 음악만으로는 클라라에 대한 마음을 다 표현하기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그렇게 들으니 마지막 부분이 더 깊이 와닿더라고요. 그리고 리스트의 성격상 마지막 부분을 화려하게 편곡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부분만큼은 원곡에 충실하게 조용히, 여운이 남도록 마무리합니다. 화려함을 즐기던 리스트가 이 곡에서만큼은 한 발 물러선 셈이죠. 그게 오히려 이 편곡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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