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역사] 격변기 시대 상황을 그리다. 자크 루이스 다비드와 그의 작품들(신고전주의)

미술은 작가 개인의 작품 활동이지만, 시대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은 한 시대의 격변기에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그림으로 그려냈던 작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자크 루이스 다비드입니다. 



자크 루이스 다비드와 신고전주의

자크 루이스 다비드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최고의 권력자로 통했는데, 당시의 시대상을 대변하고 사상을 전파하는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 그때의 시대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배경은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프랑스입니다.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사상은 아시는 대로 몽테스키외, 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의 이념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인민 주권론이 기초입니다. 근대 시민사회에 대한 이념을 토대로 새로운 국가 통치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죠. 

당시 사상적 배경인 계몽주의는 사람들의 이성을 계몽하여 생활의 개선과 발전을 꾀하려 하였습니다. 인간의 경험과 사유를 중요시하였죠. 이런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는 근대 미술이 등장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크 루이스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 미술에서는 신고전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1784년 그려진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라는 작품입니다. 다비드는 고대 로마가 세워질 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기원전 7세기 알바와 로마 사이에 패권을 얻기 위한 분쟁이 있었습니다. 양국은 서로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결투에 나설 대표 3명을 뽑기로 했죠.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가의 세 형제가 결투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라티우스의 아들 중 한 명은 상대편 집안의 딸 사비나와 혼인한 사이였고, 약혼을 앞둔 이도 있었습니다. 딸 입장에서 보면 결투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남편이나 형제를 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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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스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년)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다비드는 어떻게 그렸을까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결투에 나가기 전 세 형제는 맹세를 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슬퍼하는 여인과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칼자루를 세 형제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슬픔에 빠진 여인과는 상관없이 손을 앞으로 뻗어 목숨을 걸고 결투에 임할 것을 다짐합니다. 견고한 정신 무장을 한 남성에 비해 여성을 유약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호라티우스가의 아들 단 한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호라티우스가 딸은 약혼자를 잃어버렸고, 로마를 저주하였습니다. 살아남은 한 명의 오라비는 자신의 동생을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죽입니다. 다비드는 이렇게 프랑스 혁명의 움직임이 고조될 때, 국가를 위해 싸운 호라티우스가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개인의 희생이나 사사로운 감정은 차치한 거죠. 이 작품을 본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무척 좋아하고, 열광하였다고 합니다. 혁명을 꿈꾸던 당시 사람들은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크 루이스 다비드, 브루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 오는 호위병

다비드의 다른 작품도 보시겠습니다. 조금 긴 제목인 브루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 오는 호위병입니다. 당시 브루투스의 두 아들은 타르퀴니우스의 음모에 넘어가 반역을 도모하였고, 브루투스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사형에 처합니다. 아들의 시체가 머리 위로 들려오지만 브루투스는 여전히 국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만들어졌습니다. 다비드는 공화국을 세우며 자신의 아들까지도 희생한 브루투스를 그림으로 그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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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브루투스 앞으로 자식들의 유해를 옮겨 오는 호위병(1789년)



자크 루이스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91년 그려진 테니스 코트의 서약은 프랑스 혁명의 역동성과 당시 고조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완성작이 아닌 스케치로 남아있는 작품입니다. 작품에는 당시의 신분제에 반발한 평민 의원들이 독자적인 의회를 결성하고, 국가를 선언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당시 특권층 의회는 이를 해산시키려 하였고, 이에 대한 충돌으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죠. 이 작품에서 다비드는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커텐이 밖에서 안으로 흩날리고 있고, 한 곳을 향해 손을 든 많은 손과 모자들, 손을 맞잡은 인물은 당시 혁명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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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1791년)



자크 루이스 다비드, 마라의 죽음

다비드의 또 다른 작품을 한 가지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굉장히 유명한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입니다. 당시 자코뱅 당이 혁명을 주도하였고, 마라는 이 당의 지도자였습니다. 마라는 피부병으로 인해 자주 목욕을 하며 집무를 보았는데, 사를로트라는 젊은 여인이 찾아옵니다. 이 여인은 반대파에서 보낸 암살자였고 마라가 죽은 지 3일 만에 마라를 살해한 혐의로 이 여인도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다비드는 마라의 혁명 동지였고, 이 일이 일어난 후 3개월 만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다비드는 청렴 결백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마라를 묘사하였습니다. 마라는 손에 편지를 들고 있는데 이 편지는 암살자 사를로트가 가져온 것입니다. 편지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실까요? '전 아주 가난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라를 인민의 편에서 싸우다 죽은 영웅, 인민의 친구로 나타낸 것입니다. 마라의 욕조 앞에는 나무 상자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마라에게 다비드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다비드는 혁명가의 격정적인 죽음을 이렇게 그림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다비드,-마라의-죽음
다비드, 마라의 죽음



이후의 삶

프랑스 혁명은 민중의 세상을 하루아침에 열어 젖히지 못했고 또 다른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다비드는 이후에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807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그 모습을 성대하고 웅장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화려한 옷을 입은 황제의 모습이죠. 다비드는 이후 나폴레옹 시기에 왕실 화가로 임명되며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고, 나폴레옹이 실각하며 브뤼셀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후 말년에 들어서며 고전주의적 주제를 다시 다뤘으나 원숙미보다는 생동감이 떨어진 느낌이 듭니다. 그의 제자들도 고전주의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 또 다른 명화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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