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자신의 거실이나 집에 걸고 싶지 않은 작품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바로 뭉크의 작품, 절규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굉장히 유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광고나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이를 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뭉크 작품의 주인공은 왜 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까요? 또 인물의 표정은 어떠한가요? 오늘은 뭉크의 작품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미술 작품
미술은 사회와 개인에 다양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모더니즘 이후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을 표출했습니다. 작가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며, 관람자는 작품을 보며 와 동일한 입장을 느끼거나 자유롭게 작품을 읽어냅니다. 이처럼 미술 작품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며, 관람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차마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고통이나, 두려움, 슬픔을 미술 작품으로 만날 때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뭉크의 절규
뭉크의 절규를 더 자세히 보시겠습니다. 작품의 배경 이미지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배경에는 물과 그림이 검은색과 붉은 색으로 녹아드는 듯 합니다. 구불구불 선이 휘감겨 있고, 중간의 검은 선들은 왠지 불길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 거대한 용암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술렁이는 불길한 공간과 대비를 이루는 것이 다리의 난간입니다. 직선으로 강하게 선들이 내리 꽂고 있는데, 경사가 심해 앞으로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정면에는 한 인물이 다리 위에서 공포에 떨며 관람자를 향해 서 있습니다. 검푸른 색으로 피어오르는 소용돌이와 가라앉은 바닥에 휘말려 파도처럼 몸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인물은 귀를 틀어 막고 비명을 지릅니다. 악몽 같은 장면인 것 같습니다. 이 인물 뒤로 다른 인물 두 명이 등장합니다. 그림자같이 서 있는데 말없이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갑니다. 중앙에 위치한 인물은 철저히 고립된 듯 합니다. 눈과 코는 간단히 점으로 묘사되어 인물이 갖고 있는 공포감을 더욱 보여줍니다. 유령이나 괴물을 직접 그리지는 않았지만 공포스러운 경험을 그대로 보여주며 설득력을 갖습니다. 인물의 소리 없는 비명을 보면 머리 위의 기다란 선이 비명을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뭉크의 절규는 뭉크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뭉크는 젊은 시절, 술에 찌들어 있었고, 늘 만취 상태였다고 합니다. 술에 취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메스꺼움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뭉크는 이 작품을 그린 지 15년이 지나 정신병원에 들어갑니다. 관람자가 뭉크의 주관적인 이 작품에 공감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 경험과도 관련 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제작된 후 20세기 초반에 두 번의 세계 대전, 나치의 대 학살,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 등 큰 일이 있었습니다.
| 뭉크의 절규 |
뭉크의 생애
뭉크는 병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했습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주로 하층 계급을 치료하던 의사였습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질병과 죽음에 짓눌린 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뭉크의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일 때 떠나고, 한 살 많던 누나도 갑자기 죽게 되었습니다. 뭉크의 작품에는 이러한 모티브가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뭉크는 병든 아이라는 시리즈 작품은 1885년부터 1926년까지 제작하였습니다. 이 작품에는 어린 소녀였던 누나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주로 갈색 머리를 하는 소녀는 검은 복장을 한 채 침대에 앉아 있습니다. 옆에는 고개를 숙이고 슬퍼하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가녀린 소녀를 비치는 햇빛은 언제고 사라질 것 같습니다. 흐릿한 경계선과 수직의 붓놀림은 약한 심장 박동처럼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듭니다. 의사인 아버지조차 누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좌절과 무력감, 죄책감이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뭉크의 봄
이 작품은 1889년 뭉크가 제작한 봄이라는 작품입니다. 창가에 있는 하얀 커텐은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흩날리고, 작은 화분이 창틀에 놓여 있는데 햇볕을 바라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가에 앉아 있는 소녀는 쇠약한 모습입니다. 봄빛을 받고 있지만 고개를 돌린 채 자신과는 상관없는 듯한 모습입니다. 뜨게질한 여인이 소녀 옆에 앉아 있는데 정지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창가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이 이 두 소녀와 여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손놀림도 멈춰있습니다. 병든 소녀가 앉아 있는 이 방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 뭉크의 봄 |
뭉크의 병실에서의 죽음
뭉크의 병실에서의 죽음이라는 작품도 보시겠습니다. 화면 중앙의 뒤쪽 침대를 중심으로 인물이 T자 모양으로 있습니다. 앞에 있는 세 명의 인물은 눈, 코, 입과 같은 세부 묘사는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뭉크는 세부적인 모습은 생략하고 다른 부분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색채는 단조롭게 사용하였고, 검은색을 강조하였습니다. 앞에 보이는 여인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검은 눈동자, 해골 같은 얼굴형에서 죽음을 맞딱드린 자신의 얼굴을 보는 듯 합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실패와 불행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1908년 이후에는 정신 질환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담겨 있습니다. 뭉크는 80세까지 살며 독일의 표현주의 화풍을 대표하였습니다. 마지막 20여 년 동안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전원 생활을 하였는데 붓질도 좀 더 가벼워지고 색채도 조금 더 밝아졌습니다.
| 뭉크의 병실에서의 죽음 |
뭉크의 침대 사이의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에서는 힘없이 시계와 침대 사이에 서 있는 뭉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삐죽 들어온 침대와 기다란 시계 사이에 서 있는데 정면을 응시합니다. 벽에는 여러 작품이 걸려 있는데 작품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지만 회화를 통해 삶을 탐구하였던 자신의 삶을 뒤로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짙은 고동색의 기다란 시계는 화면의 왼쪽을 막아버린 듯 서 있습니다. 침대는 죽음을 묘사하는 듯 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밀려가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뭉크가 말년에 제작한 이 작품은 절규와 같은 격렬한 표현이나 병든 아이와 같은 깊은 슬픔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좀 더 관조적으로 삶과 죽음 앞에 서 있는 무기력한 인간의 한계를 보는 듯 합니다.
| 뭉크의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 |
마치며
현대인들은 바쁜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뭉크가 서 있는 자리에 여러분을 세워보시고,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삐 살아가고 있나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뭉크의 절규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가 삶에 찌들려 사는 내가 내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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